Second Phase

# 1.

서울 와서 항상 그리웠던 것은, 카이스트의 과도 같은 공간이었다. 서재사이로 돌아다니며 내가 끌리는 책들을 무작정 안아들고서 그 책들을 옆에 한아름 쌓아다가 읽어대곤 하던, 종이와 활자로 마음과 머리가 꽉 차는 그런 뿌듯하고 묵직한 느낌이 그리웠다. 음식 메뉴 하나 결정하는데도 오래 걸리는 나지만, 도서관에서는 선택에 대한 고민이나 신중함 없이 정말 맘 가는대로 책을 마구 집어들곤 했었다. 그 때만큼은 평소와는 다른 해방감과 쾌감까지 느끼곤 했다.

오늘, 우리 아파트 단지 옆 도서관에서 그리웠던 그 공간을 다시 만났다. 과도에 비해서 크기는 작았지만, 우리 집 옆에 이렇게 완소 공간이 있을줄이야. 생긴지 얼마 안되서 깨끗하고 편리한 것도 좋고, 지하에 북까페가 있는 것도 괜히 기분 좋았다. 오랜만에 종이 냄새 한껏 맡고서 책 3권 냉큼 들고 왔다. 아 기분좋아. 오랜만에 느끼는 이 만족감.


# 2.

작년까지만 해도 서울은 나에게 낯선 도시였다. 아빠도, 동생도 서울에 있고 나도 이런저런 이유로 서울에 참 많이도 올라갔었지만 그래도 나에게 서울은 익숙해지기 어려운 타인 같은 존재였다. 용건이 있을 때는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수는 있어도, 그렇지 않으면 서로 찾지 않게되는 그런 존재.

그런 서울이 이젠 많이 익숙해진 것 같다. 몸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나도 모르는 새에 조금씩 이 차갑기만 했던 도시 속에 물들어가고 있었나보다. 사람 북적이는 강남역과 삼성역의 서울이 모습이 아닌 아침마다 따끈한 빵이 나오는 우리 동네 빵집, 나만 알 것 같은 조용한 까페에서의 따듯한 커피 한 잔, 퇴근 시간 후에 신나서 달려가게 되는 요가 스튜디오, 그리고 오늘 새로 찾은 나만의 뉴 아지트까지. 이 도시 곳곳에서 '그들의'가 아닌 '나의, 우리의'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곳이 많아지면서, 나도 모르게 이 도시를 편안하게 느끼게 된다.


# 3.

메디컬 팀에 발령받으면서 처음 모든게 너무 서툴고 낯설기만 했을 때 내 스스로 '6개월 까지만이다'라는 말을 얼마나 수없이 마음속으로 되뇌었는지 모른다. 선배님들에 비해 내가 일진행 속도가 더딜때, 해도해도 줄어드는 것 같지 않은 업무로 매 주말마다 회사에 출근해야 했을때 '6개월 까지만이다'라는 다짐을 몇번이고 했다. 업무에 익숙하지 않아서 느끼는 막막함과 부담감, 실수로 삽질하거나 다른 팀에게 언짢은 소리 들어서 속상할 때마다 '그래, 6개월까지만 봐주자. 지금은 괜찮아. 그렇지만 6개월 이후부터는 이런 소리 듣지 말자'란 다짐을 하고 또 했었다.

이제는 업무가 주어지면 빨리 파악하고, 익혀서 '제대로' 해결해나가는데 급급했던 초보 단계에서, 문제점을 파악하고 어떻게 이부분을 overcome해서 목표를 '초과달성'할 수 있을지 고민할 수 있는 단계로 조금은 성장한 것 같기도 하다. skill적인 부분도 많이 익숙해지고 요령도 생겨서 예전만큼 쩔쩔매지 않고 능숙하게 handling 할 수 있어서 뿌듯하기도 하고, 유예기간 6개월이 초과되지 않아서 다행이란 안도감도 든다>_<ㅋㅋ


# 4.

안정. 요새 내 삶을 여유롭게 만들어주는 단어인 듯 싶다.
초기의 정신 없던 정착 단계를 지나, 이제는 조금씩 조금씩 내 생활에, 내 업무에. 내 공간에 '안정'이란 단어가 살풋이 스며들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오랜만에 만나는 이 단어가 반갑기도 하지만, 이 편안함에 너무 풍덩 빠져버리면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제 앞으로가 더 중요한 것이겠지. 지금의 안정감을 단단한 발판 삼아 더 크게 뛰어 오를 수 있는 목표를 설정하고 또다시 달려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 그다음 목표는 뭘까?


# 5.

운전을 하다보면 파랗고 높은 하늘과 대비하여 원색으로 물들어가는 가로수의 단풍이 어우러지는 가을의 정취가 물씬 느껴진다. 남다른 각오로 시작했던 2009년이 이젠 벌써 10월이다.
남은 2009년은 2010년을 더욱 화이팅 넘치는 해로 만들기 위한 담금질의 기간으로 만들고 싶다.

앞으로의 길을 더욱 힘차게, 즐겁게, 그리고 가슴이 벅찰만큼 정말 신나게, 웃으면서 달려갈 수 있도록!

by hee。 | 2009/10/09 23:51 | monologue | 트랙백 | 덧글(3)

러브 게임의 법칙

박소현의 '러브 게임의 법칙'.
매일 저녁 7시 쯤에 SBS 라디오에서 하는 프로그램 이름이다. 
퇴근 시간에 차안에서 이 라디오를 즐겨 듣곤 하는데, 가장 좋아하는 코너는 프로그램 동일명과 같은 '러브 게임의 법칙'.
7시 반쯤이면 박소현씨가 그녀만의 차분한 목소리로 시청자들의 사연 중 하나를 들려주곤 한다.
어떻게 서로 만났는지, 그래서 어떻게 사랑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들만의 사연을 듣고 있다보면
나도 모르게 기분 좋은 웃음을 짓게 만드는, 참 예쁜 코너.

목요일 날 퇴근 길에 팀 선배님들과 약속 장소로 향하면서 듣게 된 그날의 러브 게임의 법칙.
- 사랑에는 둘만의 엉뚱한 공간이 필요하다.
유치원 선생님과 유치원 기사 아르바이트로 처음 만나 사랑을 키워갔다는 그 커플의 사연을 듣고 있으려니까
국주와 내가 처음 만났던 그 때, 그 공간이 생각났다.

교양수업 같은 조로 처음 만났던 창의관 강의실.
플젝 준비를 위해 모였던 교양분관 회의실.
사귀면서 함께 걷곤 했던 학교 산책길.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 남는 공간은 기계동 강의실.
늦은 밤까지 시험공부 하다가 창문 바깥으로 환하게 새벽 동이 터오면 손잡고 기숙사로 걸어오던 추억.
국주랑 같이 치킨 시켜놓구 노트북으로 둘이 나란히 앉아 저녁 먹으면서 영화보던 그 때-
무엇을 먹어도 맛있었고, 무엇을 보아도 재밌었고, 그냥 그저 이 공간 안에 우리 둘이 있다는 것에 벅차고 행복했었던 그 시간.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 날 정도로 참 소박한 기억인데
요새는 그 시간과 공간이 참 사무칠 만큼 그립다.

우리 서로 만난지 601일.
같은 캠퍼스의 커플에서, 대전의 학생과 서울 직장인의 DC가 된지 벌써 반년이 넘었다.
예전처럼 우리 둘만의 엉뚱한 공간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 나름의 새로운 사랑의 추억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에 고맙고, 행복하다.

사랑해! :)
앞으로 더 좋은 여자친구가 될께

by hee。 | 2009/08/15 17:14 | monologue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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